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자유시 참변 (feat. 뉴라이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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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홍범도 장군에 관한 이슈가 뜨겁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셨던 홍범도 장군을 기리고, 유해까지 한국으로 모셔 왔는데 이제 와서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흉상을 철거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고증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나 해석도 분분한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알아보고, 대한 독립군의 참극과 아픔인 자유시 참변, 이어 홍 장군 흔적 지우기에 영향을 줬다는 뉴라이트 사상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서 1986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홍 장군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광산 노동과 수렵 생활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에 자극받고, 그해 9월 일본이 '총포와 화약류 단속법'을 공표하며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산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대적하였습니다. 이때 전투는 무려 9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피나는 격전 끝에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갑산 지역을 장악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한국이 일제로부터 점령당하자 소수의 부하와 함께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이후 1919년에는 3.1 운동이 일어났고, 홍 장군은 대한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40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부대를 편성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갑산, 자성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급습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만포진' 전투에서 약 70여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 봉오동 전투

영화로도 제작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일본군이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며 일어난 전투로 이때 홍 장군은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며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고, 그 기록은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성과 중 최고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1920년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후 독립운동단체와 항일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로도 활약하셨습니다.

 

이듬해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는데 그해 6월 소련이 한국 독립군에 무장 해제령을 동원하여 이 당시 많은 대한 독립군들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시 사변이었습니다.

 

이후 홍 장군은 남은 독립군과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 군관학교 혁명군 양성에 참여하셨고, 1923년 연해주 이만에서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한편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했으나 러시아로부터 고령을 이유로 거부당하였습니다.

 

이후의 삶은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면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셨고, 그 뒤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한편 홍 장군의 유해는 임시 안장 후 중앙 공동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 홍범도 장군의 업적

홍 장군의 업적은 생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연극 '홍범도'가 공연된 바 있으며 그의 일대기는 '홍범도 일지'로 정리된 바 있습니다. 타계하신 후에는 묘 주변에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졌고, 거주하던 집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집 주변은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한편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하였고, 2021년 8월 15일 홍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습니다.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대한 독립 군단과 이르쿠츠크 파 공산당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으로 대한 독립군은 공산당과 러시아 동맹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말합니다.

 

참변의 원인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 탄압이 거세지면서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군 부대는 자유시에 모여 독립군 통합을 논의했으나 그 과정에서 독립군 간에 주도권 경쟁이 싸움으로 번지면서 참변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고 각각의 해석과 평가도 다르나 파쟁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악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사상

20세기 중-후반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보수-우익 성향 또는 반체제적 저항운동 단체나 운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신우익,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로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하여 진보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는 동시에 안정적 개혁을 주장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1980년대 뉴라이트 사상이 등장하여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아울러 복지 국가론을 비판하고, 공공 정책을 위한 시장 기구의 부활과 시민권 제한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하여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국가개입의 축소, 작은 정부 지향, 시장기구 옹호, 평등 지향 배제, 시민권보다 재산권을 우위에 두는 정책 기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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